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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가 있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1년 정도 휴가를 줘서 독서를 하게 하는 것이다. 나라의 인재들만이 받았던 특별한 휴가였다. 예나 지금이나 벼슬살이를 하다 보면 깊은 독서를 할 시간이 없다. 사람 만나야 되고, 전화 받아야 되고, 사람 만나다 보면 술 먹기 마련이고, 집에 돌아가면 집안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호학(好學)하던 군주였던 세종은 유능한 신하들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 제도를 마련했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가독서는 조선의 매우 독특한 인재관리 시스템이었다고 보여진다. 이 제도는 세종 때부터 시행됐지만, 최초로 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은 조선 초기의 명신인 변계량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세종’·이한우).
1년간 휴가를 받아 책을 읽던 장소는 어디인가.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인재들이 책을 읽던 건물을 ‘호당’이라고 했다. 지금의 옥수동 근처의 한강 주변을 ‘동호(東湖)’라고 하였고, 용산 근처를 ‘남호(南湖)’라고 불렀다. 마포 근처는 ‘서호(西湖)’였다. 동호에 있었던 독서당이 동호당(東湖堂)이고, 남호에 있던 독서당이 남호당(南湖堂)이다.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최항, 김수온, 서거정, 강희맹, 노사신, 성현, 최부, 김일손, 조광조, 이황, 정철, 이이,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등을 비롯한 쟁쟁한 인재들이 모두 사가독서를 받아 호당에서 책을 읽었던 인물들이다. 이율곡도 34세 때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율곡이 동호당에서 책을 읽으면서 매달 제출해야 하는 월과(月課)로 지은 글이다.
명문가 집안들을 방문해보면 지금도 ‘호당록(湖堂錄)’이라는 문건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집안 선조 이름이 이 호당록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호당록에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집안의 긍지이자 자랑이었다. 우리 문화에서 ‘독서’는 매우 뿌리 깊은 전통이자 상류사회의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년간 휴가를 받아 책을 읽던 장소는 어디인가.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인재들이 책을 읽던 건물을 ‘호당’이라고 했다. 지금의 옥수동 근처의 한강 주변을 ‘동호(東湖)’라고 하였고, 용산 근처를 ‘남호(南湖)’라고 불렀다. 마포 근처는 ‘서호(西湖)’였다. 동호에 있었던 독서당이 동호당(東湖堂)이고, 남호에 있던 독서당이 남호당(南湖堂)이다.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최항, 김수온, 서거정, 강희맹, 노사신, 성현, 최부, 김일손, 조광조, 이황, 정철, 이이,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등을 비롯한 쟁쟁한 인재들이 모두 사가독서를 받아 호당에서 책을 읽었던 인물들이다. 이율곡도 34세 때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율곡이 동호당에서 책을 읽으면서 매달 제출해야 하는 월과(月課)로 지은 글이다.
명문가 집안들을 방문해보면 지금도 ‘호당록(湖堂錄)’이라는 문건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집안 선조 이름이 이 호당록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호당록에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집안의 긍지이자 자랑이었다. 우리 문화에서 ‘독서’는 매우 뿌리 깊은 전통이자 상류사회의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