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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먹지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정말 그 걸 알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내 스스로도 들 정도였으니...
삼켜져버린 듯 사라졌던 문화생활에 대한 미련 한 구석에
작은 음악회라는 소식이, 놓여 진 상차림처럼 반가웠다.
선뜻 아파트 청약처럼 예약을 신청하고 프로그램을 보니
오래 전 내가 키타로 즐겨쳤던 제목들도 눈에 들어와
오랜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기 전의 작은 설렘까지 들게 만드니 좋기만 하다.
내가 키타를 치던 당시엔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구나가 키타를 쳤다.
그러다보니 꼭 정식 클래식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로망스” 하나 정도쯤은 쳤다.
그렇게 나도 로망스 치는 정도로 몇 곡의 클래식을 반주했었다.
그 중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반주 기법이 좀 힘든 편이라 쉬운 곡은 아니었다.
그 트레몰로 기법은 많은 연습을 필요로 했었고
곡 또한 평범치 않게 긴 편이어서 악보 보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 걸 당시엔 어렵게 혼자서 독파를 했었다.
그 후 자랑삼아 남들 앞에서 능숙하게 완주 했던 기억이 새로웠으니...
지금도 내 집에는 키타가 있다.
하지만 위의 사진처럼 그저 데코레이션으로 한 구석만 차지할 뿐
저 키타는 과거 오래 전
클래식 키타와 12줄짜리 웨스턴 키타를 모두 부셔먹고
한 동안 접하지 않다가 결혼 후 첫 아이를 낳은 기념으로
우연히 사 놓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 키타는 지금 군대 간 아이와 동갑인 셈이니
그저 세월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데 일조만 할 뿐....
그런데 아이들 어려서부터
내가 아이들에게 키타를 가르쳐준다 했어도 아이들은
우리 어려서와는 달리 반응이 늘 시큰둥해 했었다.
물론 그러다보니 저렇게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지만..ㅎㅎ
그렇다고 그 동안 전혀 키타를 안 쳐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혹 몇 년 만에 한 번 키타를 치려다 보면
그 자체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음을 아는 사람은 이해할 게다.
우선 먼지를 닦아야 하고, 녹슨 줄을 갈아야 하고,
다시 새롭게 튜닝을 해야 하는 일들은
그 후 아예 키타를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된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키타를 접할 일이 있어
과거를 회상하며 로망스를 쳐 보았다.
잘 치던 때와는 물론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런대로 기억이 났으니 몇 번의 연습 끝에 표정은 밝았다.
그리고는 다시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건 웬일인지 정말
나를 어느 다른 무지의 세계에 순간 이동시켜 놓은 듯
머릿속을 텅 비어놓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고는 허무해 했었다.
새까만 먹지의 악보를 바라보는 듯
내가 겪지 못했던 또 다른 바보 앞에
기억상실증만이 존재한다는 걸 키타를 안고 깨달은 적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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