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웃는다 그도 웃는다
시인이 골라준 최근 시 지상낭독회
세희
꽃 떨어지고 새 잎 난다. 아이들이 날리는 저기 꽃잎을 따르고 세희가 달려와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고 작은 손, 이 아이의 아버지를 내가 가르쳤다. 가난은 배고픈 봄날처럼 길고 멀다.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지 이십년, 아내는 떠나고, 버린 고향에다가 어린 두 딸을 또 버린다. 마을 앞 솔밭 솔잎은 푸르고, 빈 논에 네 잎 자운영은 돋는다. 시린 새벽, 잠든 너희들을 깨워 데리고 와 잠든 너희들을 두고 마을을 빠져나간다. 솔바람 소리 따라다니던 내 청춘, 내 어찌 눈물을 감추랴. 한점 꽃잎처럼 살아 있던 우리 집 불빛이 진다. 아! 어머니, 강물에 떨어지는 불빛은 뜨거운 내 눈물입니다. 아버지의 가난은 때로 아름다웠으나, 나의 가난은 용서받은 곳이 없습니다. 무너진 고향의 언덕들, 어디다가 서러운 이내 몸을 비비랴. 흐린 길이다. 어스름 새벽, 아내와 아이들이 없는 서울 길을 달릴, 아, 초행길처럼 서울은 낯설고 멀기만 하리라. 몽당연필에 침을 발라 표지가 너덜거리는 공책에 글씨를 쓰던 남루한 네 모습을 내 어찌 지우겠느냐. 이 슬픔과 부끄러움, 이 비통함과 분노가 내 일생이다. 세희의 손을 꼬옥 쥔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들의 손은 어찌 이리 작고도 따사로운가. 꽃잎들이 맨땅을 굴러간다. 세희가 내 손을 놓고 꽃잎을 따라간다. 나는 날마다 꽃잎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환생을 꿈꾼다. 세희의 온기가 남은 내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온기가, 남은 온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세희야 날아와! 세희야 날아와! 이리 날아오라는, 말이 안 나온다. 꽃 지고 새 잎 나는 봄, 어둠속에 떨어진 나무 가지같이 기가 막힌 나의 빈 손. ‘창작과 비평’ 2008 봄
시인이 일러준 이 시를 느끼는 법 이름을 조금 바꿨지만, 세희는 우리 학교 학생입니다. 세희의 아버지도 내가 가르쳤으니, 세희한테 나는 할아버지뻘이죠. 세희의 부모는 몇 해 전 이혼했습니다. 세희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집에 삽니다. 우리 학교에는 이런 아이들이 꽤 있습니다. 마을 전체로 따지면 더 많습니다. 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 학교로 전학 온 아이들은 표정이 없어요. 다 죽어있어요. 아이들 일기장에는 엄마, 아빠라는 말이 아예 없습니다. 작년 우리 반엔 네 명이 그랬는데 정말로 다 없더라고요. 세희는 꼭 해가 꼴딱 넘어갈 때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집에 갑니다. 밭일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할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혼자 먹습니다. 엄마도 없이 밥을 먹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안스러워 저도 많이 웁니다. 학예회 연습하는데 식구가 아무도 안 온 한 아이는 학교 뒷마당에서 울다가 제게 들켰지요. 보듬고 같이 울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는, 다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용택(金龍澤)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 ‘나무’ ‘그래서 당신’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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