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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 일을 앞뒤 안가리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대단히 존경한다.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심신을 다 바치는 그 용기를 나는 존경한다. 그렇기에 코미디언 조혜련은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MC로, 개그맨으로, 엄마로, 아내로 나름의 위치에서 최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나가는 그녀, 조혜련.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자.

 

 

 

가난과 싸웠던 그녀의 어린시절.

 

지금도 자주 조혜련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그녀의 어린시절은 '대단히' 가난했다. 딸부잣집 다섯째로 태어난 '딸'. 그녀가 태어나던 날, 그녀가 딸이라는 사실에 할머니도 울었고, 어머니도 울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그 옛날 농담처럼 진짜 밭을 매러 나가야했고 그녀를 비롯한 다섯명의 딸들에게는 할머니의 구박이 가해졌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탄식과 슬픔에 묻혀 태어난 이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채소 장사를 시작했다. 몸 약하고 무능한 아버지 대신에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곁에 그녀는 유일한 러닝 메이트였다. 경상도 고성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채소 장사를 시작했던 어머니 옆에서 어린 조혜련은 크게 소리쳤다. "싱싱한 쑥갓, 채소 사세요!" 라고.

 

 

단속반이 뜨면 어머니 보다 먼저 부리나케 채소를 싸들고 도망가면서 시장통에서 억척스럽게 채소 장사를 시작한 그녀는 그곳에서 지긋지긋한 '가난' 보다 '사람' 과 '웃음' 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그녀는 스스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는지 장사 수완이 아주 대단했었다' 라며 자평하기도 한다.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마는 쉬지 않고 일했다. 당시 산본은 개발이 안되어 여기 저기에 밭이 많았다. 우리 집 역시 고모가 빌려준 밭을 부쳤다. 우리 여섯 딸들은 본격적으로 엄마를 도와 농사를 했다. 밭으로 나가 일렬횡대로 앉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밭두렁의 잡초를 뽑는 일, 채소를 갈무리 하는 일 따위도 모두 우리 몫이었다.

 

 

그러나 그 힘든 농사일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남녀차별이었다. 우리가 밭에 나가서 힘들게 논을 갈고 있을 때 막내는 노란 유치원 모자를 쓰고 하드를 물고 있었다. 우리 여섯 딸들이 바가지를 뒤집어 쓰고 머리를 자를 때 지환이는 멋진 미용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잘랐다. 어린 마음에도 그 놈의 고추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때마다 다짐했다. 그 놈의 아들보다 훨씬 나은 딸이 되서 여보란 듯 복수하겠다고."

 

 

 

연영과에 합격하며 인생이 바뀌다.

 

어린 시절 '죽도록' 공부가 하고 싶었던 조혜련은 힘든 일상 속에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조혜련이 여상을 가기를 바랬다. 이유는 '취직이 잘되서' 였고 조혜련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반대 속에서도 그녀는 인문계에 원서를 넣었고 안양여고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모든 공부를 자신의 힘으로 해나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었지만 조혜련은 자력으로 고등학교를 당당히 졸업했다. 그녀의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애초에 연세대 간호학과를 지원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고배를 마실 수 밖에 없었던 조혜련은 차선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적중했고 그녀의 인생에 일대 터닝포인트를 마련해줬다. 코미디언으로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에게 연영과는 가장 적합한, 가장 어울리는 전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것은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말에 동감한다. 하지만 때가 지났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공부는 평생 해야하는 것이고 난 미칠듯이 배우는 것을 사랑한다. 배움이 없었다면 내 삶은 아무 의미도 없었을테니까. 공부하고, 또 공부하면서 나는 나 '조혜련' 이 살아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소름이 끼칠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학업을 포기한다. 아마,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그 뒷모습이라 생각한다."

 

 

 

코미디언이 된 공순이.

 

연극영화과는 조혜련에게 가장 어울리는 전공이었지만 장밋빛 미래를 마련해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가난한 현실과 엄청난 대학 등록금의 벽에 다시 한번 부딪힐 수 밖엔 없었다. 밤새운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업에도 뒤쳐지기 시작한 그녀는 1년만에 대학을 휴학하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 취직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매일 12시간씩 일하면서 그녀는 하루일당 1만 2천원을 벌었다.

 

 

야근수당까지 다 합쳐 한달 월급 40만원도 안되는 돈을 쥐고 그녀는 8개월 동안 죽어라 일했다. 놀러가지도 않았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공장 기숙사에서 잠만 자고 일어나면 바로 일하는 이른바 '공순이' 의 생활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게 8개월 동안 그녀는 2백 5십만원을 모았고 대학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다. 인간 조혜련이 일궈낸 또 한번의 승리였다.

 

 

복학하자 마자 그녀는 김국진, 금병완과 함께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했다. 뛰어난 재능에도 때를 만나지 못했던 이들은 힘을 합쳐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모두 보고 다녔다. 첫 대사만 하고 바로 쫒겨나는 일이 비일비재 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은 1992년 대학개그제에 당선되면서 여의도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

 

 

1992년, 그녀의 나이 23살 되던 해... 11살에 채소장사를 시작했고 15살에 김밥장사를 했으며 20살에 공장에 취직했던 그 작은 여자아이는 그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봄바람이 불고, 벚꽃이 피고, 햇살 좋은 날에 나는 캠퍼스를 떠났다. 어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들어온 연영과인데......나는 나의 꿈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괜히 마음이 약해지고 쓸쓸해져 관객석에 앉아 혼자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출발을 했고, 그 출발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울엄마는 골룸.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은 뒤 14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굴곡 없이 최정상의 위치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청춘스케치> 를 디딤돌을 세우고 <폭소대작전> 으로 스타덤에 올라선 그녀는 고향인 KBS를 떠나 MBC에 자리를 틀어 앉은 뒤에도 <웃으면 복이와요><오늘은 좋은날><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 꽁트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망라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어디에서나 '열심' 이던 그녀의 열정은 개그코너 <울엄마> 에서 완연히 빛을 발했다. 서경석, 김진수 등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과 호흡을 맞췄던 <울엄마> 는 "경석아~!" 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높은 시청률 자랑했고 '시즌 2' 까지 리바이벌 되며 조혜련 최대의 히트작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 때에 이르러 그녀는 이경실, 이성미 등과 인연을 맺었고 이경규, 김용만, 김국진, 서경석, 이윤석과 함께 MBC 간판으로 활약했다.

 

 

<울엄마> 이후에도 <오늘은 좋은날><코미디 세상만사><여자 대 여자> 등으로 꾸준한 인기를 이어가던 그녀는 2004년 <코미디 하우스> 에서 '골룸' 분장을 하며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데 성공한다. 여자 코미디언으로서, 한사람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힘든 결정일 수도 있었던 일을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해냈고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그녀가 왜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상의 자리에 위치했는지를 단박에 증명해보였다.

 

 

게다가 <여걸 5> 와 <여걸 6>, 아나까나 역시 조혜련 특유의 개성이 빛을 발한 작품들이니 이쯤이면 그녀가 왜 성공한 코미디언인지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런지.

 

 

"1996년 나는 내 생애 가장 뜻깊은 졸업식을 가졌다. 그것이 대학의 졸업식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와 가족들이 모두 와 준 졸업식이기 때문이었다. 내 사각모를 쓴 엄마는 내게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 보다 그런 상황을 꿋꿋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자립심을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렸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싸워나가는 자세,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아닌가."

 

 

 

미래를 향한 또 다른 도전.

 

그녀는 그녀 말대로 '배움' 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고, 일어 삼매경에 빠지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그녀는 정말 배운다는 것,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같다. 그런 그녀가 최근 일본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 TV Sunday Japan 에 출연해 평균 6% 시청률을 10%로 끌어올리며 성공적인 첫 걸음을 내딛은 조혜련은 올해 본격적인 일본 진출을 계획 중이라고.

 

 

한복을 입고 "한국인" 임을 당당히 내세운 "Sunday Japan" 속 그녀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뿌듯한 감정을 느끼게 해줬다. 게다가 한양대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딸 예정이라니 미래를 향한 그녀의 도전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미래도 조혜련의 땀과 열정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있고 무엇보다 집안에서 나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자식은 아들 밖에 없다며 여섯 손녀를 쳐다보지도 않으셨던 할머니는 이제 다섯 째 손녀인 나를 제일로 생각하시며 아버지 역시 자신이 못다핀 꿈을 펼친 딸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시며 엄만 나를 통해 지난날을 보상받은 것 처럼 자랑스러워 하신다.

 

 

'겨울이 깊으면 봄은 반드시 가까이 있다.' 는 명언처럼, 나는 겨울을 봄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것이다. 딸이라는 여자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그녀의 오버를 사랑해보자.

 

1992년 데뷔했으니 햇수로만 15년의 세월동안 시청자들의 변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조혜련은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진정한 개그우먼이다. 물론 그의 '오버' 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좋지 않은 눈초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오버' 또한 조혜련만의 '스타일' 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모든 코미디언들에게, MC들에게 자신만의 스타일이 존재하듯이 조혜련의 스타일도 존중되어야 한다.

 


'아줌마가~' 또는 '여자 따위가~' 라는 말은 조혜련에게 너무 가혹한 굴레가 아닌가. 그의 오버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의 진행 스타일까지 쓰레기 취급하며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무참함은 분명 거부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개그우먼 조혜련의 미덕은 '부지런함' 에 있질 않은가.


정통 코미디와 버라이어티 쇼를 넘나들며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혜련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고 있는 개그우먼이다. 그에게 있어 '골룸' 이나 '슈렉' 같은-어떻게 보면 여자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분장들도 코미디를 위해 당연한 것일 뿐이다.

 


그에게 진짜로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은 '골룸 분장을 한 자신이 전국에 방송되는 것' 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망가지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러한 부지런함이야 말로 지금의 조혜련을 만든 진짜 이유일 것이다.

 

노력하는 개그우먼, 조혜련. 물론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조혜련이 '노력' 하는 연예인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MBC <사과나무> 녹화 도중 둘째 아이가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방송을 원활히 진행한 조혜련에게 '역시 프로다' 라는 칭찬을 해주는 것은 그의 노력에 대한 대중의 당연한 보답일 것이다.

 

 

"가끔씩 나는 여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딸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나서 여인이 되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가 또 어머니가 되기까지.....오랜 삶을 지나온 것도 아닌데 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여자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아니 여자가 갖는 삶이란 참으로 고단하다. 그래서 어렸을 적 나는 그러한 고단함을 인정하기 싫었다.

 

 

좀 더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 고단함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다. 고단함 속에서 온전한 자유로움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더욱 소중한 나의 지난 시간들....그 시간들을 나는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코미디언 조혜련)

출처 : ♤끄적끄적 이야기♤
글쓴이 : 냐하하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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