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유람선을 타고 상류를 향하면서...
케이프타운은 내게 건조하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푸른 포도 농원과 제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아름다운 해안을 품고 있는 도시라지만 나는 늘 건조하고 목마른 느낌이다.
태양의 대륙 아프리카여서, 절절 끓어오르는 땅이어서 그럴까.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케이프타운이 늘 내게 건조한 이유는 강이 없기 때문이다. 강이 없으니 강을 건너 가로 놓인 다리를 볼 수가 없다.
이국 생활의 낭만을 떠올리면 너즈넉하게 흐르는 강과 그 강을 가로지는 낭만적인 다리 하나쯤 떠올리는 내게 케이프타운은 그래서 항상 목마르고 건조한 도시이다.
케이프타운의 야경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지만 강이 없어 불빛 받아 반짝거리는 강물을 볼 수 없고 그런 강물 위를 천천히 걸어볼 수 없는 다리가 없어 아름답다는 그 야경이 그래서 내게는 못내 아쉽다.
강 줄기를 따라 오르면서 ...물위에 수초들이 드러나있다
케이프타운에 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케이프타운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강이 있다. 바로 브리드 강(Breede River)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케이프타운에 속하는 것은 아니고 웨스턴 케이프 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브리드 리버는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부스터, 보니베일, 에쉬톤, 세레스, 멕그리거, 몬테규, 스웰른담, 로벗슨등 아름다운 도시를 휘감아 돌면서 그 넓은 포도밭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와인 루트로 알려진 웨스턴 케이프의 R62 지역을 따라 흐르고 있는 브리드 강 주변에는 작고 아담하고 별스럽지 않지만 편안해질 수 있는 곳이 많다. 하지만 브리드 강은 슴은 듯 흐르는 강이고 그 강을 따라 올망졸망 자리 차지하고 있는 쉼터들은 마치 이방인들에게는 들키기를 꺼리듯 숨어 있기 때문에 그런 곳을 찾아 뜻하지 않은 호사를 누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부자는 유람선 끝에 발을 담그고 앉아 무슨 정담을 나누었을까
우리가 처음 이 브리드 강을 만난 것은 남아공 생활을 막 시작하고 겁 없이 시작했던 케이프타운 탐험에서였다.
볼품없는 지도 한 구석에 작게 인쇄된, 환상적인 크루즈라는 광고 문구만 믿고 망설임 없이 예약을 하고 초행길을 물어물어 그곳에 처음 갔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서의 그 실망감이란...분명히 강이라고 하는데 강폭은 겨우 10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고 물 색깔은 탁하고 2층 유람선이라는 것도 사진과 달리 더할 수 없이 초라한 목조 유람선이었다.
하지만 그런 실망은 막상 두 시간여의 브리드 리버 크루즈를 시작하면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은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머리 위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며 유람선 이층에서 마주한 바람은 그 어느 곳에서 만난 그것보다도 우리를 호흡을 깊게 하고 자유롭게 했던 기억이 있다.
강가에 카누를 띄우고 낚시를 즐기는 젊은 남녀
두해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낯설던 첫해와는 달리 두 번째라고 반기는 사람도 없건만 마음이 푸근하고 마치 오래전 알던 곳을 다시 온 것 같은 정다운 느낌이다.
첫해에는 유람선을 타러온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이번에는 우리 가족과 다른 가족 달랑 둘이다. 크지도 않은 배에 많지 않은 의자가 듬성듬성 자리가 빈다.
많지 않은 승객을 태우고 ‘거위’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천천히 천천히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은 벌써 유람선 이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람선 이층에 자리 잡고 선 아이들은 즐겁기만 하다
거슬러 올라가는 강 왼쪽으로는 푸른 잔디와 포도 농원이 펼쳐지고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나무와 온갖 꽃들이 피어 흐드러져 있다. 그 사이 사이에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집들이 간간히 눈에 뜨인다.
강 기슭에 배를 대고 낚시를 하는 연인도 보이고 아름드리 나무 밑에 텐트를 친 일행이 한가하게 앉았다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한다.
참...별스럽지도 못하다.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지도록 고요하다는 것과 그 고요함을 깨는 새의 지저귐. 그리고 아프리카의 그 푸른 하늘과 온갖 그림의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 아래 초라한 배를 타고 그저 느리게 느리게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뿐이다.
호화 객실을 갖춘 여객선도 아니고 번듯한 강의 화려하게 장식한 유람선도 아니지만 브리드 강의 거위는 그 어떤 여객선이나 유람선보다도 우리 마음을 부자인 듯 착각하게 한다.
엄마와 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딸은 이시간을 기억하지 못해도 따뜻함으로 남을게다.
여 주인 제인이 배에 준비해둔 몇 개의 낚시대를 꺼내주었다. 아이들은 서로 다퉈 낚시를 해본다고 나서지만 가짜 물고기 모양 미끼에, 그것도 천방지축 사내 녀석들에게 잡힐 물고기는 하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은 녀석들의 뒷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고 소라스럽던 녀석들은 조용히 물고기 입질을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들이 고기를 잡을지 고기가 아이들을 잡을지...어설프지만 진지한...
강 상류를 돌아 나오면서 풀이 길게 자라난 한 쪽에 배를 댄다. 수영을 할 수 있다. 배가 멈추어 서자 사람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간식 거리를 꺼내놓고 아이들은 유람선 이층에서 강을 향해 뛰어내리느라고 소란스럽다.
물 밑으로 수초가 자라 올라 느낌이 좋지 않다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유람선 이층에서 할 수 있는 한 온갖 폼들을 잡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요란스럽게 물로 뛰어든다.
넓지 않은 강을 수영해 오가느라고 부산스러운 아이들
넓지 않은 강폭을 수영해서 오가느라고 수선스러운 녀석들을 뒤로 하고 유람선의 주인인 캘빈이 유람선 제작 과정이 담긴 사진첩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설명한다.
River Goose 라는 이름을 가진 목조 유람선은 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포도 농원을 하는 제인과 캘빈 부부가 12년 전에 직접 몇 달에 걸쳐 만들어 띄운 것이다.
캘빈과 제인의 생활을 가늠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넓지 않은 포도농원 그리고 화려하지 않은 목조 유람선. 이미 중년을 넘어선 캘빈과 제인은 땅이 주는 열매와 강이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그들의 삶을 가꾸면서 살아갈 것이다.
강 기슭에 배를 대고...아이들은 수영하느라 부산하고 케빈은 배에 대한 설명을 한다
수영으로 힘을 뺀 녀석들이 다시 배 위로 오르고, 배는 다시 떠나온 곳을 향해 천천히 천천히 돌아간다.
강폭도 넓지 않고 수심도 깊지 않고, 강이라고 하기엔 안쓰러운 브리드 강의 유람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두 시간 남짓의 여정에 특별한 것을 눈에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인생에 단 한번뿐인 오직 단 한번뿐인 그 순간에 우리는 아프리카의 푸른 하늘을 담고 바람을 담고 구름을 담고 새소리를 담았으며 순간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슴 깊이 새겨 넣을 수 있었을 것을 믿는다.
강가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사람들
수영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은 아이들은 강 기슭에 매어놓은 카누와 허름한 작은 배를 타고 다시 노를 젓기 시작한다. 큰 녀석 작은 녀석들. 검은 머리 노란 머리 할 것 없이 뭐가 그리 신났는지 강 기슭이 울리도록 소란스럽다.
푸른 잔디에 누워 잠시 시린 하늘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고 아이들 노는 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들썩거리며 입이 귓가에 올라가 붙는다.
아이들의 소리 강가에 울려 퍼지고...불 피워 점심 준비를 하고...
수영과 노젓기로 허기진 아이들은 고기 구워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오가며 먹을 것을 보챈다.
유람선은 이제 멈추고 아이들은 스스로 노를 저어 강물 위를 떠다니고 있다
아프리카의 땅끝. 케이프타운. 평범한 여름날의 또 하루가 게으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태양의 대륙 아프리카 절절 끓는 곳에서 숨어 흐르듯, 들키고 싶지 않은 듯 작고 조용한 몸짓으로 흐르는 브리드 강가에서의 하루는 강물처럼 그렇게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초라하고 낡은 목조 유람선으로 했던 브리드 강의 크루즈는 그 어떤 호화 여객선이나 유람선이 주는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을 우리에게 주었다.
사는 것은 어쩌면 그날 만났던 그 강물처럼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살아보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강가의 푸른 잔디에 누우면 시린 푸른 하늘이 눈부시게 부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