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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퇴역 장성은 이렇게 개탄한다. “주적(主敵)을 잃어버린 군대에서 이 밤은 춥다.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제독은 진급에서 누락되어 퇴직하고, 북한의 공격을 받고도 주적이 아니라서 어물거리다가 군함과
장병을 아울러 잃은 제독은 시말서 한 장 쓰지 않았다.”
안기부(현 국정원) 출신 간부는 햇볕정책에 의문을 제기한다. “남한의 햇볕이 그들의 옷을 벗기기 위함이란 걸 뻔히 알면서 김정일 정권이 이른바 선군(先軍) 정치의 옷을 벗어 던지고 개혁 개방으로 나올까?”
핵에 대한 정부의 애매한 대처 방식도 질타당한다. “핵이란 비대칭 군사력까지 보유한 북한에 김대중 정권은 포용정책을 써 왔다. 모래성 같은 경제적 우위를 앞세워 어떻게 전용될지 모르는 현금을 몇 억달러씩 북한에 갖다 바치면서 북한을 포용해 왔다고 우긴다.”
보수 언론단체인 자유언론연대(자언련·自言聯) 소속의 한 언론인은 ‘북한은 북한 내부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에 대해 “김일성 부자의 폭정과 왕조적 권력 세습은 물론 수백만 인민을 아사시키는 선군 정치와 인권 말살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떠들거나…”라고 꼬집는다. 그는 “수정주의 역사관과 북침설의 근거 몇 개쯤은 주워섬길 줄 알아야 지식인 흉내를 낼 수 있는 세월”이라고
한탄한다.
전직 장관과 고급 공무원의 연합 모임인 하로동선(夏爐冬扇) 소속의 한 인물은 “학업에 몰두하는 것보다 정치적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고시 합격보다 학생운동 경력이, 고위직에 이르는 데 훨씬 빠른 지름길이 되는 세상이 고착되고 있다. 시민운동이 가장 효율적인 엽관(獵官)의 수단이 되어 가고, 정권이 임명할 수 있는 관변 요직은 감투에 눈먼 홍위병들의 전리품으로 변해 가는 세상”이라는 말로 최근의 정부 입각 행태를 비판한다.
퇴직 교원들의 모임인 ‘참 스승의 길’소속 인사는 학교 현장을 걱정한다. “스스로 스승이기를 포기하고 노동자의 뒷줄에 자리잡은 사람들에게 장악된 우리의 초·중등 교육과정은 국민형성(國民形成)이라는
제도교육의 중요한 책무 하나를 온전히 뒤엎어 버렸다. 전교조 핵심에 침투한 친북 극좌 세력은 대한
민국 국민으로 키워야 할 아이들을 인민공화국 인민으로 길러내고 있다.”
모두 소설 속의 이야기다. 하지만 신랄하게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소설가 이문열(58)씨가 최근 발간된 문예계간지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발표한 신작 소설을 통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정치 세력의 대북정책과 ‘386 그룹’을 강하게 비판한 것. ‘세계의 문학’ 봄호부터 소설 ‘호모 엑세쿠탄스(‘처형하는 인간’이라는 뜻)’를 연재해온 이씨는 이번에 나온 완결편에서 386과 주사파 세력, 현 정부 대북정책의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따졌다.
45장(章)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시국에 대한 비판이 가장 강렬하게 표출된 곳은 종반부인 36~37장이다. 등장인물들은 “현 정국이 마치 추운 밤 같다”는 뜻에서 ‘한야(寒夜)대회’라는 시국토론회를 경기도 양평에서 개최한다. 토론회가 열리는 시기적 배경은 2002년과 2003년. 이 토론회에는 스스로를 ‘삼치회(三癡會:세 종류의 바보 집단. 안기부 대북파트와 검찰의 시국공안 담당, 경찰 대공분실)’와 ‘오천사(五賤社:다섯 부류의 천덕꾸러기 모임. 김지하가 시 ‘오적’에서 조롱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 장성, 장관을 지칭)’라고 불리는 보수 인사들이 참석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극단적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경종”
이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시국 걱정’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소속한 단체의 명칭들 또한 세상에 대한 풍자로 가득하다. 주적(主敵)이 없어졌음을 한탄한 퇴역 장교가 속한 모임은 떨어진 별들이란 뜻의‘오천사 낙성(落星) 분회’. 현실 세계의 예비역 장성 모임인‘성우회(星友會)’를 비틀어 차용한 이 용어에선 소설 속 풍자로 볼 수만은 없는 씁쓸함이 묻어난다. 한야대회에 참석한 단체 이름인‘삼치회’라든가 ‘오천사’ 등의 명칭이 모두 세상과 불화하고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요즘 보수세력의 처지를 자조하는 표현이다.
이른바 탄핵 역풍에 대한 새로운 분석도 흥미를 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는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일약 원내 과반수 정당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헌탱캡’이란 등장인물은 탄핵이 궁극적으로 집권세력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열린우리당의 정치실험은 실패했다”는 말이 최근 여당 고위당직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상황이어서 소설과 현실을 겹쳐 읽는 긴장미가 있다.
“결국 지난 대통령선거의 승리는 386세대와 주사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냐?” “이 정부 하는 꼬락서니 좀 봐라. 취임 몇 달이 지났다고 벌써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소리가 나오며, 여당이 분당한다는 이 희한한 소문은 또 어찌된 거냐?”
“이번 탄핵 결의로 노무현 정권, 이미 수면 밖으로 대가리 끌려 나와 공기 한번 먹은 대어(大魚)꼴 난 거야. 이제는 큰 힘 못 써. … 탄핵 역풍 맞아 열우당이 다수당 돼도 그래. 아마도 386 찌꺼기들이나 홍위병 세력의 요행수 국회 진출은 늘겠지만, 그 탄돌이 의원들이 많을수록 오히려 이 정권의 수명을 빨리 갉아먹게 될 걸. 그 터무니없는 승리감이 그러잖아도 부족한 그들의 경륜을 더욱 조심성 없이 드러내 보이게 하겠지. 아니, 주사파 수령론(首領論) 세력의 경박하고 절제 없는 자기 폭로만으로도 얼마 못 가 국민들을 진절머리 나게 만들어 버릴 걸.”
내년 1월 단행본으로 출간
이문열씨는 지난 12월 5일 전화 통화에서 소설 속 보수인사들의 격정적 토로에 대해 “현 정부 전체를 비판하기보다는 현재 국론이 이렇게까지 양분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의도”라고 말했다. 한야대회를 목격한 운동권 출신의 주인공은 충격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비분과 강개에 젖게 하였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종교적 광기와도 흡사한 불안과 혼란에 빠져들게 하였을까.”
이문열씨는 주인공의 고민을 통해 보수세력을 껴안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소설 속 보수인사들의 주장 중에는 보편성을 상실한 극단적인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한야대회에 참석한 보수인사 중에는 위험하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도 등장합니다. 소설에 그런 부분을 넣은 것은 극우적 주장마저 옹호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극단적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기보다는 충돌하는 두 세력의 갈등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이씨는 지난 봄호부터 4회에 걸쳐 원고지 2500장 분량의 소설을 이 문예지에 연재해 왔다. 소설은 내년 1월 초 민음사에서 2~3권 분량의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씨는 소설 발간에 맞춰 이달 말쯤 귀국할 예정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해온 이씨는 내년 초 다시 도미해 동부 보스턴 주변에서 1년간 더 머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