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다산 정약용은 ‘향리론(鄕吏論)’에서 고을 수령은 처음 부임했을 때 선정을 베풀려 하지만 향리(鄕吏:아전)가 수령에게 “내 계획대로만 하면 10배는 남을 것이다”라고 꼬인다면서, “수악(首惡)은 향리이고 향리의 말을 따른 수령은 그다음”이라고 했다.
충청도 옥천(沃川) 관아의 문서집인 ‘관성록(管城錄)’은 사람들이 향리를 ‘간악한 아전’으로 여긴다고 썼다. 따라서 “수령은 아전을 사람의 도리로 대해서는 안 되고 엄격하게 감독하고 엄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향리들이 백성 수탈의 주범이라는 내용들이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생재(生財)에서 “아전들은 녹도 없이 공일만 하므로 뇌물로써 생계(生計)를 삼는다”고 했다. 봉급 없는 행정 관료인 아전의 부패는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자신들만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모는 데 분개한 향리들이 만든 것이 탈춤이란 분석도 있다.
고종 30년(1893) 경상도 고성부사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默)은 ‘고성부총쇄록(固城府叢鎖錄)’에서 제석(除夕)행사로 행해진 탈춤에 대해, “풍운당(風雲堂)을 보니, 아전 무리들이 악기를 갖추고 놀이판을 벌였다.
이것은 해마다 관례적으로 치르는 행사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놀이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촉탁 오청(吳晴)은 봉산(鳳山) 탈춤에 관한 조사보고서에서 “봉산 탈춤은 원래 봉산 이속(吏屬·아전)들이 자손 대대로 공연해 왔다”고 전한다. 아전들은 탈춤을 통해 양반들의 허위와 위선을 폭로하면서 백성 수탈의 주범은 자신들이 아니라 양반들이라고 선전한 셈이다. 탈춤은 향리층의 자기 변명으로 시작된 풍자극이었던 것이다.
검찰이 법원의 잇단 영장 기각을 풍자하는 ‘백설공주 살인미수 사건’이란 풍자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한다. 서로 얼굴 붉히며 싸우는 것보다는 운치가 있어서 낫다. 누가 사법정의를 훼손하는 기관인지에 대한 풍자와 함께 누가 사법정의를 세우는 기관인지 경쟁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