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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를 시작한지 12일, 내가 정리하고 싶었던 문제들을 올려놓고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생각의 갈피를 잡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간다. 방문하신 분들의 의견들도 나에게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오늘은 종교와 신앙에 대한 나의 의견 하나를 올려보려고 한다. 약간 장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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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비판의 이유가 대부분 그 기복적 성격, 교회의 기업화, 정치관여 문제 등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외적인 문제들을 피하고, 절대성을 띤 계시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신자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 헛디딜 가능성이 있는 함정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물론 신앙은 이성적 도덕 보다는 심령적인 측면이 있지만, 나는 주제 넘게 내가 가진 이성을 잣대 삼아서 일반인으로서 판단할 수 있는 종교에 있어서의 오류가능성을 분석해 보고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신앙인들에게 괴리를 느끼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기술해 보려고 한다.

 

 

1. 성전(聖典)의 내용이 가지는 상황적 성격

 

 종교는 인간의 우주관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특징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관, 세계관은 그것이 종교에 있어서와 같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면, 총체성이 전제되어야만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의견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간이 세계와 우주를 총체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경험을 통해서는 절대적 우주관, 절대적 세계관을 가질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믿어야만 하는 우주관을 부여하는 종교는 경험의 영역을 뛰어 넘은 것이다. 그래서 종교,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같이 절대성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종교는 동시에 계시적이어야 한다. 즉,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에게 알려준 내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과 쿠란과 같은 계시된 성전의 역사성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즉, 그 계시라는 것이 수백, 수천년 전의 과거의 인간에게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그 계시는 과거 어느 시점의, 특수한 환경적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내려진 특수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사람들이 성경이나 쿠란을 읽을 때 이러한 배경적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마호메트 시대의 부족 내전이 현대의 문명충돌로 연장되기도 하고, 민족종교일 때 쓰여졌던 구약성경의 내용들이 세계종교가 된 현대의 기독교에 잘못 적용되기도 한다.

 

 

 2. 성전과 교리의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이해관계

 

 이슬람의 경우 창시자 마호메트의 부족에서 통치자인 칼리파들이 선출되었고, 뒤를 이어 세습왕조들도 등장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에는 그 교리가 세계제국 로마의 통치이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종교의 창시자들이 신격화될 수 밖에 없으며, 그 이유는 종교의 시조가 신과 관련 맺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교의 창시자는 실제 이상으로 신격화되어 왔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필요성은 성전을 형성하는 내용의 취사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이어져 왔다고 볼 때, 수많은 유대교의 종교서적들 중에서 취사선택을 통해서 현재의 구약이 확정된 과정, 그리고 외경을 포함한 많은 기록들 중에서 현재의 신약이 선택된 배경에도 이 <신격화>에 유리하도록 성경을 조성하려는 인간적인 의도를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이는 또 교리의 형성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데, 예를 들어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리의 핵심적인 내용도 그 확정 과정에서 니케아 종교회의(AD. 325)를 거쳤으며, 이후 451년의 칼케돈 종교회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은 종교적 의견조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치투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에 물리적 충돌과 반대자에 대한 강제유배 등의 세속적 사건들이 일어난 끝에 힘이 우월한 교황 측의 승리로 인해 교리가 확정된 것이다. 

 삼위일체론이란 인간의 인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신에 대해 이야기한 변신론(辯神論)이고, 기독교인들의 주장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일부 성직자들에게 계시한  천상의 정보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이 물리력까지 가담된 인간들 간의 회의를 통해서 결정되었다고 볼 때, 이것을 계시로 볼 것인가 혹은 인간적인 논의인 변신론의 하나로 볼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판단하는 수 밖에는 없다.

 즉, 교리가 완전무결하게 신적인 진리만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형성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상황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3. 주의해야 할 초자연성

 

 기독교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창조했으며 신이 우주만물의 유일한 원리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 스피노자는 신이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이, 유일신이 있다면, 그 신의 영역은 피안의 세계와 초자연적 현상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와 자연까지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종교인들은 종교와 신앙의 의의를 초자연성, 이른바 기적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 병세가 위독한 자녀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마귀를 쫒는다며 주술적인 기도만을 계속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사회적 책임과 도덕을 초월하는 신앙만능은 있을 수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유일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생명의 번식이라는 창조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신의 부모된 심정까지 탄생하는 모든 생명에게 이식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각각의 사회성원이 일상에서의 책임을 통해서 신의 뜻을 대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일상적 책임을 방기한 기적에의 열망, 이승에서의 성장을 포기한 저승에서의 행복의 바램이란 합리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4. 나만이, 우리만이 옳을 수가 있을까?

 

 앞의 논의와 연결된다. 아무리 계시적이라고 주장하는 교리도 그 형성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때, 인간의 지력과 수용성의 한계를 가진다는 것, 그러므로 완벽한, 완성형의 교리는 없다는 것이다. 완벽하다면 최초의 한 명의 선지자에게 신앙과 종교의 모든 내용이 정합하게 계시되었어야만 한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 교리가 형성되어 왔다는 것, 그리고 교리의 형성과정에 많은 인간적인 논란 역시 있었다는 것을 주목한다면 현재의 교리도 완성된 것이 아니고 인류의 정신적 성장과 함께 완성되어 가는, 혹은 새로이 계시되는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본다면 신앙인의 타 종교, 타 종파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불합리하다. 성장하고 있는 것이 다른, 역시 성장하고 있는 것의 현상태를 보고 비교 판단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인식이 들면 신앙인은 귀를 열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 그리고 타 종교의 교리와 그 형성과정에도 주목하게 된다. 다른 종교와 종파 역시도 자신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시대적이고 환경적인 특수성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형성되어온 가치가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출처 : 우리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아마추어 철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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