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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겨울, 꽁꽁 얼어붙은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 서양 외교관 부부들이 모였다. 날 달린 구두를 신고 얼음을 지친다는 빙족희(氷足?)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고종황제가 시범을 보여 달라고 청한 것이다. 향원정에 드리운 발 뒤에서 빙족희를 구경하던 명성황후가 못마땅해했다. “남녀가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게 꼭 사당패와 색주가들 같구나.”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 비숍이 기록한 한국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광경이다.


▶한국 피겨 대표가 처음 동계올림픽에 나선 게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 대회였다. 13세 이현주의 엉성한 기술이 안돼 보였던지 외국 코치들이 다투어 지도를 자청했다. 아이스링크 직원들은 한국팀 음악테이프가 편곡이 엉성하고 소리도 지직거리자 “원곡을 우리가 편곡해 녹음해 주겠다”고 했다. 이광영은 남자부 26명 중 꼴찌, 이현주와 김혜경은 여자부 32명 중 31·32위를 했다.


▶1996년 여섯 살 소녀가 어머니 손을 잡고 과천시민회관 아이스링크에 스케이트를 배우러 왔다. 이 유치원생을 일곱 달 가르쳐 본 코치가 어머니에게 “가능성이 보이니 꼭 피겨를 시켜라”고 했다. 6년 뒤 국내를 평정했고 지난해 세계 주니어 피겨선수권을 제패한 김연아다. 김연아가 지난 주말 러시아에서 열린 그랑프리 5차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133.70점을 따내 우승했다. 일본 아사다 마오의 기록 133.13점을 깨뜨린 세계 최고 점수다.


▶아침 7시 30분 기상 후 2시간 웨이트트레이닝, 오전 11시부터 훈련, 오후 2시부터 다시 훈련, 오후 4시부터 또 훈련…. 살인적 훈련으로 단련된 김연아도 작년 주니어선수권 우승 후 고비를 맞았다. 빙판에 넘어져 허리 디스크가 도지고 꼬리뼈까지 다쳤다. 김연아를 치료하며 허리에 대침(大鍼)을 놓았던 한의원 원장이 감탄했다. “큰 침이 박히는데 태연히 잠을 자요. 17세 소녀 같지가 않아요.”


▶러시아가 반세기 내내 피겨대회 우승을 독차지한 힘은 어린 재목들을 모아 호되게 조련하는 주니어 피겨전문학교에서 나왔다. 그 러시아가 김연아를 뛰어넘을 유망주 발굴에 비상이 걸렸다. 이번 모스크바 대회에서 캠코더로 일일이 김연아의 연기를 기록하던 러시아 코치는 “우리 선수들이 배워야 할 과제가 바로 ‘유나 킴’의 동작”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 피겨는 남의 것이려니 했던 우리 곁 어디에 저런 보물이 있었던 것일까. 김연아가 갈수록 더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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