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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은 오전 11시20분에 시작됐다. 1948년 8월 15일의 일이다. 대형 태극기가 걸린 단상 중앙에는 하늘색 모시 두루마기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제복 차림의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나란히 앉았다. 이승만은 7월 20일 국회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197표 가운데 180표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리 나이로 일흔넷이었다.

정시(定時)가 되자 대회회장 오세창(吳世昌)이 “영원히 기념할 8·15를 맞이하여 신생(新生)정부 대한민국을 갖게 된 감격이 더할 바가 없다”는 말로 개회를 선언했다. 3·1독립운동 33인 중의 한 사람인 그 역시 그해 여든다섯. 이어 이승만이 마이크 앞으로 나가 요즘 역사 교과서가 애써 귀를 닫고, 철부지 역사선생들이 일부러 지워버린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 동양의 한 고대국(古代國)인 대한민국정부가 회복되어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고 투쟁해온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야기는 민주의 원칙으로 이어졌다.

“국민 중에 일부는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나 우리는 30년 전(상해임시정부)부터 민주주의를 채용하고 실행해 왔습니다.”

민권(民權)과 자유 그리고 자유의 한계 문제가 뒤따랐다.

“민주정체(政體)의 요소는 정부와 국민이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발표하는 사람을 포용해야 합니다.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숭(尊崇)하되 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으로나 도당(徒黨)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면 용서가 없을 것입니다.”

근로자 우대와 통상과 공업 진흥의 포부도 빼놓지 않았다.

“정부가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와 농촌에서 근로하며 고생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을 개량하는 것입니다. 민족의 생활을 향상시키려면 우리 농장과 공장의 소출(所出)을 올려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경영주는 노동자를 이용만 해선 안 되고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害)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의 방략(方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국이 기뻐하는 오늘 북쪽을 돌아보면 비감(悲感)한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소련군이 유엔대표단을 막아 북의 1000만 동포가 민국(民國) 건설을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우리에 근접한 이웃이므로 우리는 더불어 평화와 친선을 유지하려 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을 소련이 원한다면 우리 민국(民國)은 언제든지 소련과도 친선(親善)할 것입니다.”

연설은 눈비를 맞으며 40년 해외를 떠돌았던 이승만의 다짐으로 마감됐다.

“가장 중대한 바는 국민의 충성과 책임감과 굳센 결심입니다.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을 세계에 표명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합니다. 대한민국 30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30년’은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헤아린 햇수다.

알다시피 이승만의 이런 꿈과 약속과 다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허물과 잘못이 컸다. 그러나 이 연설이 무대에 올려졌던 1948년 대한민국은 1인당 평균 소득 50달러 안팎, 수출 2200만달러, 국민 교육수준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가 95%인 나라였다. 바로 그해 10월부터는 제주·여수·순천·대구에서 남로당계의 무장폭동이 연발했다. 현실은 이승만의 꿈을 받쳐 주기에는 너무 야멸차고 각박했다.

국민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선 박정희 시대까지, 소련과도 친선을 트는 데는 노태우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고, 자유와 민권이 제대로 숨을 쉬기 위해서는 더 오랜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그래도 최빈국(最貧國)에서 세계 10대 부국(富國)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행진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김일성의 반대편에 세우고, 김일성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신념과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일성의 나라’에서 ‘김일성 아들의 나라’로 바뀐 북한의 오늘이 그 증거다.

오는 12월 19일 선출될 새 대통령은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순백(純白)하다는 어림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와 대한민국이 역대 대통령의 자랑과 허물을 딛고 지금 여기 이르렀다는 역사의 연속성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런 생각, 그런 눈의 대통령이라면 짓밟힐 대로 짓밟히고 지워질 대로 지워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의 자취를 공정한 저울에 달아 그에게 역사의 바른 자리를 찾아주는 길이 보일 것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바로 세우는 일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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